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고백했을 때 친구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이랬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김소연이?"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과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늘일 때 내 기억은 바야흐로 약 십 년 전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다. 연애는 차치하고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기억 역시 십 년 전이라는 사실이 좀 문제였다. 십 년 전 축적해둔 내 설렘은 n 탕 끝에 결국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마땅히 추억으로 불려야 할 감정이었으나, 그 이후 뛰어본 적 없는 심장 덕에 종종 미련 가득한 주인공이 되어버리곤 했다. 고양이는 무척 사랑하는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만한 일인가 싶다가도, 정말이지 놀랄 일이라 혼자 방정맞게 일기를 써댔다. 십 년 만이라 놀란 건 친구들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민형과 난 이미 십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동네의 가장 큰 보습학원에서 알게 된 사이로, 같은 반이었던 다른 중학교 친구였다.

당시 15살이던 난 민형을 꽤 좋아했었다. 앞 뒤줄에 앉아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몇 번의 대화를 이어가다, 결국 민형을 만나는 것이 학원에 오는 이유가 되어버렸던 시절이었다. 어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민형에게 내 마음을 전하게 되었고, 민형은 그런 내게 사귀자고 답을 했었다. 난 민형에게 지금 이 나이엔 어느 누구랑도 만날 생각이 없다고 미안하다 답했다. 그 답은 몇 분의 고민도 없이, 민형을 좋아하는 마음보다 훨씬 중요한 당시 소연의 지론이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불같은 사랑을 하겠노라 다짐했었던 시절)

그 연락 이후 얼마 안 되어 학원을 옮기게 되었고, 민형과는 당연하고도 자연히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당연히 잊고 지내다 지난 11월, 십 년만에 민형과 연락을 하게 되었다. SNS에 뜬 이름 석 자에 그저 반가운 마음에 먼저 팔로잉 버튼을 눌렀는데, 그 버튼 하나로 서로의 안부를 묻게 된 것이다. 답지 않게 용기를 낸 것 같아 후회가 밀려왔고, 적당한 인사로 연락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웃기게도 전혀 소식을 모르던 각자의 십 년을 전해듣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통화가 네 시간을 넘기고 나서야 나 설레고 있군 싶었다. 민형과 연락을 하는 내내 마치 내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굴게 되었다. 뭘 먹었는지,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나하나 빼곡히 전하며, 그저 웃어버리게 되는 시간이었다.

민형과 연락을 한 지 삼 일째가 되던 날. 내가 결단을 내려야겠다 싶어 민형에게 말했다.

"우리 이렇게 매일 연락하면 서로 좋아하게 될 게 뻔하지 않아?"

(지금 생각하니 참 당돌했다 싶을 정도로 대놓고 물어봤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불같은 연애를 하겠다 다짐했던 20대가 되어서인가. 나도 몰랐던 용기가 샘 솟아 아주 적극적으로 굴고 말았다.

한 번은 민형이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랑 연락을 이어갈수록 두려워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어찌나 목소리를 떨던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러나 싶을 정도였다. 자세히 말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민형에게 연속극을 시청하는 우리 할머니처럼 말했다. 

"그거 사랑이야 !"

혹자는 이 답을 보고 내가 꽤나 전략적으로 민형에게 대시한 거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정말 오해다. 그 순간 민형이 표현하는 두려움은 단번에 사랑임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마루가 우리집에 온 첫날에 내가 느꼈던 감정이었고, 너무도 사랑하는 친구와 일 년간 연락을 하지 않았을 때 느꼈던 감정이었고, 그리고 혼자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와 엄마 아빠를 찾았던 여덟 살의 소연이 느꼈던 감정이었으니까. 소중해질수록 영영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 끝을 헤아리며 시작할까 말까 머뭇대는 마음.

다음 날부터 난 민형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 말을 전했을 땐 온 몸이 뜨거워져 이불을 걷어차고 잠을 청했다. 속으로 별별 생각을 다 했다. 

'내가 단단히 미쳤나보다.'

내게 사랑한다는 말은 제일 어려운 말인데, 이렇게 내뱉어버렸으니 이거 완전히 사랑이구나 싶었다. 누구에게나 만남은 특별하다고 하지만, 어쩐지 내 만남은 유독 각별했고 신비롭게 느껴졌다. 내 이야기를 듣고 운명이라 덧붙이는 친구도 있었고, 나도 그런 때가 있었다며 웃음을 짓던 친구도 있었다. 엄마는 처음엔 본래 다 그런 법이라며, 사랑을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뭉뚱그려버리곤 했다. 그런 엄마 앞에서는 사랑의 속성을 다 아는 사람처럼 굴었고, 혼자서는 일기장에 특별하다는 수식을 남발하고 있다. 

내가 연애를 한다는 소식에 십년지기 친구는 내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람 덕에 행복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기 일마냥 기쁘다며 들떠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게 왜 그렇게 기쁜걸까 했는데 이제 조금은 알겠다. 

사랑이 만들어내는 자장을 헤아려보게 된다. 민형과 만난 이후, 부쩍 사랑을 주어로 두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선명하다. 나도 잘 몰랐던 나의 호오가 드러나고, 내게 잠재되어있던 사랑이 자꾸 표현된다. 그러다 끝내 전하지 못했던 사랑을 떠올리고, 그 시간으로 다시 되돌아가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한 사람과 깊은 마음을 나누는 일은 원래 이런 마음까지 가능케 하나.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서툰 것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것은 지금의 나를 나 자신이 제법 마음에 들어한다는 사실이다. 본디 도사린 사랑을 이제야 발견해내는 내가 꽤 사랑스럽다.

 *

저변의 원한을 단숨에 사랑으로 치환해내던 사람들은 환히 빛난다. 그 빛을 주워 먹으며 겨우 자라던 내가 기어코 사랑을 품어버렸다. 다들 소란스럽게 기뻐한다. 그리고 영원을 건넨다. 내 사랑이 길이길이 이어지길.

p.s 내밀한 일기장을 공유하는 게 원시사랑을 연재하며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어요. 5화가 되어서야 용기가 생겨 첨부합니다 !

- 이제 정말 봄이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