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은 제법 점잖고 적당하고 힘이 있다 생각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억지로 비추지 않아도, 내 사랑을 여태껏 알려진 사랑으로 적지 않아도 어떻게든 가닿을 것이라 자신했다. 나 자신에 대한 특별한 자신감이었다기 보단 사랑이란 네임 밸류에 대한 확신이었다. 사랑이 주어가 되면 어떤 서술어가 와도 꽤나 그럴 듯 해보였다. '사랑이 전부(Love is all.)'라는 관용구가 죽지 않고 여지껏 살아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실 뜯어보면 이렇게 비약적인 문장도 없는데, 어떤 씬(scene)에 배치되어도 사랑은 언제나 전부가 되어있었다.

한때 디스토피아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배경의 소설들을 쌓아두고 읽었던 적이 있다. 세상은 종말 직전이고, 인류는 지긋하게도 삶을 이어가고 있다. 남은 인류가 이어가는 삶은 삽시간에 희망을 피우고, 희망은 당연하게도 사랑을 자아내는 공식. 이 공식은 결국 인류가 죽지 않는다는 답까지 도출해낸다. 건져보면 단순하디 단순한 이 공식은 세기를 거듭할수록 비약적 논리가 아닌, 최후의 보루라 여겨진다. 전부라는 서술은 최후까지 포함하기에, 사랑은 끝내 최후까지 살아남는다. 이 공식이 이해되는 데까지 내겐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때엔 제일 뻔하다 여겼고, 어느 때엔 가장 신비로웠다. 내게 사랑은 늘 그랬다. 제일 뻔하고 지난했다가도 가장 신비하고 중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사랑에 대한 서술을 이랬다 저랬다 번복하고 나니, 분노도 슬픔도 끝내 사랑으로 바뀐다는 머리 희끗한 어른들의 말이 수긍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빽빽히 검은 머리인 내가 사랑을 전부라 두기엔, 분노나 슬픔에 으스러지는 날이 훨씬 많았다. 사랑이 평생의 동력이라 말하는 작가들을 동경하며, 분노가 동력인 나의 미래를 점쳐보다 좌절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최후의 인류는 내가 될 수 없음을 확신하며 하루를 뭉겠다. '어차피.' 따위의 부사만이 수식되던 날들이었다.

나의 이런 날들을 오래 지켜봐주던 친구는 원시사랑을 시작해보겠다 말했을 때, 소란스럽게 기뻐해줬다. 내게 전하는 편지 말미에 늘 '사랑을 담아서'라 적는 친구이다. 굳이 적지 않았다 하더라도 빼곡히 사랑 뿐인 친구의 마음을 알 수 있었지만, 끝내 사랑이라 적어보이는 사람. 내가 여태껏 이어온 것들이 전부 사랑이었음을 난 이제야 깨달았지만, 진작 사랑이었음을 알아줬던 친구이다. 원시사랑을 시작해보겠노라 마음 먹었을 때 떠올린 얼굴이기도 했다.

지난 주에 그 친구를 거진 세 달만에 만났다. 세 달의 공백 끝에 내가 전하고픈 말은 그 친구가 자주 소리내어 전해주던 사랑 뿐이라 무작정 넓은 엽서를 사왔다. 하나 둘 잇는 문장들이 모두 변명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말미엔 꼭 사랑이라 말하겠다 다짐하며 무작정 쓰기 시작했다. 친구를 만나자마자 편지를 건넸다. 혹 꾸겨질까봐 먼저 주는 것이라 말했지만, 사실 그건 핑계였다. 쉬이 꾸겨지지 않을 두께의 엽서를 산 것도 계획 중 일부였기에, 꾸겨질 일은 일어날 리 없었다. 친구는 내 편지를 받으며, 주섬주섬 내게 줄 편지를 건넸다. 세 달동안 우린 하고픈 말이 잔뜩 쌓여버렸구나 했다. 세 달의 공백이 무색하게 우린 늘 그랬듯 봄에 들떠하며 걸어다녔다.

친구에게 세 달간 일어난 대소사를 전하며, 난 평소보다 자주 웃어보였던 것 같다. 아마 연애를 시작해서도 있을 것이고, 꽤 오래 준비해왔던 시험 결과가 좋아서도 있었겠지만. 친구에게 비로소 사랑을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날 제일 기쁘게 해주었던 것 같다. 친구와 헤어지면서, 어서 내 편지를 읽어주길 바라며 인사를 건넸다. 나 역시 집에 돌아오자마자 친구가 준 편지를 읽었다. 여전히 '사랑을 담아서' 로 편지는 끝이 났다. 친구는 내 편지를 읽고 '소연은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난 친구의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다, 결국 새 엽서를 꺼내어 답장을 썼다. 

친구에게 소리내어 사랑이라 전하고 난 밤, 지레짐작하며 미뤄둔 마음들이 전부 떠올랐다. 내가 사랑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하며 미뤘던 마음들. 원시사랑은 그 마음들에 이름 붙이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해가 지날수록 사랑은 오롯이 사랑으로 잔존하는 것이 아닌, 그 사이 증오와 슬픔 따위가 뒤섞여 끝내 사랑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감히 사랑을 동력삼아 살아가고 있다 말하고 싶어질 때면, 친구의 얼굴을 떠올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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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친구에게 전한 편지

  

2. 제 친구는 오래 이런 마음들을 전해온 사람이에요. 아래 두릅색 버튼을 누르시면, 친구가 전해준 마음들을 볼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