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것은 우롱차 뿐이다. 그 외엔 모두 연해진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가장 정통으로 시간을 맞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시간을 거스르는 건 오직 사랑 뿐이다. 과거와 현재, 곧 다가올 미래까지 지 이름 하나 꿋꿋하게 지키고 있는 건 오직 사랑 뿐이다. 난 이같은 사랑의 영속성을 아빠에게서 배웠다. 내게 한 번도 소리내어 진정 사랑했다 전해준 적 없지만, 그가 지난 과거는 오직 사랑 뿐이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난 내가 품을 미래가 그와 닮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가 지녔던 사랑이 너무도 빛났고, 잘났고, 그래서 샘이 났거든. 최초의 질투였고, 그를 향한 나의 질투는 여전히 현재 진형형이다. 딱 그만큼 문학을 사랑해보고 싶다. 

*

내 방엔 폭이 넓고, 키가 큰 5단 책장이 하나 있다. 못 해도 달마다 열 권 이상의 책을 들이는 내게 늘 넉넉한 품을 내어주는 책장이다. 함께 책의 무게를 견딘 지는 올해로 7년 차에 접어 들었다.

이 책장은 파주 운정 가구단지에서 맞춤 제작한 원목 가구인데, 맞춤 제작 가구라기엔 이름값이 책정되는 브랜드의 디자인과 유사한 면이 아주 많다. 가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사포질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곳곳이 거칠다. 

모름지기 가구는 목재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아빠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마지못해 들이게 된 것이었다. 들였을 땐 영 마음에 차지 않았는데, 7년을 함께 하니 내 방의 그 무엇보다 정이 간다. 어쩐지 사포질 하나 잘 되지 않은 꼴도 내 방에나 어울리지 어디에 어울리겠나 싶기도 했다.

7년 동안 든든히 자신의 몫을 해내던 이 책장이, 최근 병에 걸렸다. 인수(人樹)공통 감염병인 곰팡이 피부염에 걸려버린 것이다. 원목 가구에 곰팡이가 슬면, 땅 아래 뿌리박은 나무가 병에 걸렸을 때처럼 반점이 돋아 오른다. 본디 자신이 나무였음을 말하듯, 타고난 테를 따라 하얗고 바슬바슬한 수포가 돋아난다. 이 수포가 눈에 보인다는 것은 목재가 이미 안에서 썩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재빨리 책들을 꺼내어 햇볕에 바싹 말려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곰팡이 포자는 금세 책의 면면에 달라붙어, ‘너도 나무였지.’하고 읊조린다. 그럼 책은 아무런 의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몸에 갈빛 반점이 돋아나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책들이 처음처럼 푸른 새잎을 돋아낼 능력까진 없기에, 나 역시 책의 자연 회귀를 마냥 관망할 순 없다. 만약 푸른 새잎을 돋아낼 줄 안다면, 미련 없이 내버려 두었을 지도 모르겠다. 

책의 자연 회귀를 막기 위해선 책 사이사이에 방습제 역할을 해낼만한 얇은 두께의 지류를 넣어줘야 한다. 신발 밑창보다는 얇고, 책 한 장 보다는 두께가 있는 지류. 이미 반점이 돋은 책들은 거실 베란다에 활짝 펼쳐, 이틀은 두어야 한다. 그렇게 책장에 꽂힌 약 200여권의 책들을 말리는 데, 빠르면 5일 정도가 걸린다. 그 정도의 시간과 정성을 녹여야, 책의 자연 회귀를 막을 수 있다. 원목 책장은 물과 락스를 2:1 비율로 섞은 희석액을 뿌려두고, 꼬박 하루는 말려야 한다. 어줍잖게 말렸다간, 원목 책장에 어색한 자국 하나 늘리는 것에 그칠 뿐이다.

그 중에선, 이미 내가 손 쓸 수 없는 곳도 있다. 바로 5단 책장의 제일 위층, 아빠의 시집들에 내어준 층이다. 이 층에는 아빠가 대학생 때부터 읽어왔던 시집 서른 권 정도가 꽂혀있다. 보균지(紙)라 위층에 따로 격리를 해두었다기 보단, 내가 들인 책들과는 너무 다른 빛깔을 띠고 있어 어울리지 못했다. 어쩐지 이질적인 배열을 보면 견디지 못하는 특성은 아빠를 꼭 빼다 박은 것이라 따로 자리를 마련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열 살이 되었던 해부턴가, 아빠는 당신이 간직하던 시집 한 두 권씩을 내게 건네었다. 아빠가 건넨 시집들을 뭣도 모르고 따라 읽다, 언젠가 글을 쓰고 싶다 소리 내어 말했었다. 아빠는 내게 그 말을 들은 날 밤, 남은 십여 권의 시집들을 모두 내 책장에 꽂아두었다. 

아빠의 시집들은 곰팡이 피부염에 걸린 지 오래다. 아빠가 내게 건넸을 때부터 누렇긴 했지만, 책을 꼭 pvc 커버로 싸던 아빠의 습관 덕에 흘러간 시간보단 더디게 병이 진행되고 있었다.

근데 이제 보니 불에 한 번 그을려진 것처럼 누렇다 못해 까무잡잡해진 것도 있고, 정말 지가 나무인 줄 아는지 곳곳에 반점들을 키워 테를 띤 시집들도 있다. 이 시집들을 한 장 한 장 쓸고 나면, 지문이 닳아버린 것 같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축축하고, 해묵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이 시집들이 꽂혀있던 책장 맨 위층 역시, 원목 테를 따라 스며든 곰팡이 자욱이 유난히 많다. 잘 닦이지도 않는다. 

위층을 어찌해야할지 몰라, 한숨을 내쉬니 아빠가 내게 말했다.

“그 시집들 버리든가 해라. 걔네 때문에 책장에 곰팡이 스는 걸 수도 있어. 그거 빼면 다른 책들 더 꽂아둘 수도 있고.”

원래 생은 시작됨과 동시에 헌 것이 된다고, 아빠는 내게 종종 말했다. 

버리는 것을 너무 슬퍼하지 말자고, 무엇이든 너무 슬퍼하면 시를 쓰게 되는 것 같다고.

이 말은 아빠가 내게 건넨 시집들 중 이성복 시인의 『그 여름의 끝』 맨 앞장 면지에 쓰여 있던 말이다. 누가 썼는지는 여전히 모른다. 아빠에게 여러 번 물었지만, 그때마다 날 쳐다보지도 않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답할 뿐이었다.

아빠는 그래서 이제 시를 쓰지 않는구나. 슬퍼하지 않는구나.

아빠의 일생이자 평생이었던 문학은 내 방에서 빠르게 헐어가고 있다. 이미 곰팡이가 슨 시집인데, 왜 버리질 못하냐며 묻는 아빠께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아무 답도 않는 내 옆에 와, 손을 보태었다. 아빠의 시집 사이사이 얇은 종이를 꽂기 시작했다.

여전히 날 보지도 않고 내게 말했다.

"자리를 내어줘야 할 때가 오면, 이 시집들은 싹 다 버려라."

며칠이 지나고, 아빠의 팔에 붉은 반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빠는 내 책장의 곰팡이를 닦아내다 옮은 것 같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이것이 당연한 이치라는 듯 이럴 줄 알았다는 듯 말했다.

*

아빠는 더 이상 소설도 시도 쓰지 않는다. 여전히 내 책장 위칸은 곰팡이 피부염에 걸린 그의 시집들이 차지하고 있다. 한 권도 버리지 못한 채,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가 사랑했었던 문학은 나의 과거와 현재, 곧 다가올 미래에도 내가 사랑할 것임을 확신한다. 그는 연해졌지만, 난 진해지길. 그의 사랑은 이렇게 변해 헐지도 못하고 계속 되고 있다 꼭 전할 수 있길.

p.s 아빠의 시집들에게 내어준 제 책장 위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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