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시사랑 3월호 1화 : 불같은 사랑

2023. 3. 11.

원시사랑 3월호 1화 :

(프롤로그) 불같은 사랑

아마 소연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사람이겠지.

내 기억 속 13살 소연은 분명 사랑을 믿던 아이였다. 또래 친구들이 으레 그렇듯 산타는 당연히 믿지 않았지만, 사랑은 믿었던 그런 아이였다. 사랑의 속성 중에서도 제일은 영원이라 믿었고, 사랑에게 영원은 불가결. 사랑 곁에 영원이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겼다. 어떤 사랑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또래 친구들이 무언가를 상상하며 배시시 웃는 사이, 소연은 당당하게 '영원한' 사랑이라고 답하던 아이였다.

13살 소연이 영원한 사랑을 타인에게 증명하는 방법들은 하나같이 전부 무모만 했다. 티끌 하나 붙지 않은 흰색 a4 용지 네 장을 줄줄이 붙여 10pt 남짓한 글씨로 빼곡히 마음을 전하는 일. 이 방법은 상대에게 엄청난 피곤함을 유발하는데, 당시 소연이 할 수 있는 방법 중 가장 정성스러운 것이랬다. 상대의 편안함은 차치하고 여과없이 자신의 마음을 탈탈 털어 보이는 일. 우습게도 소연 역시 쓰다 지쳐 결국 마지막 네 번째 장엔 '사랑해' 한 문장을 수백 번 늘이고 꺾으며 하트 모양을 만들고 말았다. 끝이 없는 것이 사랑이랬지만 더 이상 사랑을 전할 줄 몰라 끝을 냈고, 끝을 내고서야 자신의 사랑이 영원보단 부족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사랑의 꼴 중 가장 당연하고도 자연한 하트 모양을 만들어냈다. 자신이 전하는 마음이 영원한 사랑이길 바로 알아차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생성된 하트 모양이었다. 그럼 상대는 '사랑해' 가 몇 번 쓰였는가를 세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로 채워진 하트를 보며 소연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는데 그쳤다.

"내가 사랑한다고 얼마나 오래 썼는지 알아?"

"결국 사랑한다는 말 하나잖아. 이 말 전하는데 뭐가 그리 빽빽해."

13살 소연은 영원한 사랑을 노동력으로 증명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셈이다. 이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소연은 방에 들어와 자신이 가진 것 중 제일 값비싼 것을 꺼내보았다. 값비싸고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것. 13살 소연은 영원한 사랑을 수로 증명해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기엔 자신의 방 안에 값 비싼 것들은 고작 서너개 뿐이었고, 저금통엔 500원 스무 개가 다였다. 누가봐도 끝이 보이는 사랑이었다.

13살 소연은 영원한 사랑을 전하기엔 자신이 아직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노동력도 수도 무엇 하나 완벽하지 않아 아직 자신의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에 이른다. 엄마 아빠도 30살이 다 되어서야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으니, 자신도 그쯤은 되어야 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고 말아버린다.

14살 소연은 여전히 영원한 사랑을 꿈꿨으나, 쉬이 영원을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16살까지 그랬다. 14살부터 16살까지의 소연에게 종종 고백하며 사귀자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소연은 이렇게 거절했다.

"나, 어른돼서 불같은 사랑할 거야."

16살 소연은 영원을 말하지 않았지만, 불은 꿈꿨다. 그러니까 소연에게 '불'이라 함은 뜨겁고 격렬하고 절절 끓는 것이 아니라, 영원함의 속성을 타고난 유일하게 번질 줄 아는 것. 여기저기 번져 끝이 보이지 않는 것. 16살 소연은 사랑이 영원하기 위해선 번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7살부터 19살까지의 소연은 사랑과 아주 동 떨어진 삶을 살았다. 대신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삼년 간 살았다. 종종 사랑은 하고 싶었으나,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20살부터 22살까지의 소연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헐뜯고 혐오했었다. 사랑의 속성이 구원이라 믿는 친구에게 그래서 사랑은 결국 망할 수 밖에 없다고 일갈하기까지 이른다. 그럼에도 그 시절 소연은 자신의 고양이에게만큼은 푸지게 사랑한다 말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24살 소연은 불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 영원을 남발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 많아 집 안에 종이란 종이는 다 써버렸다. '사랑해'를 꺾고 이어가며 하트를 만들진 않지만, '사랑해' 한 마디에 도달하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다.

그러니까 소연은 당연히 사랑을 믿는 사람이다.